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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과 이상(理想)
2024
이선영 미술평론가
학생들은 가뜩이나 무거운 가방에 인형 등 장식물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흐들흐들해진 애착인형 들고 다니는 이도 종종 본다. 기능주의를 넘어서는 그것은 병적 징후라기보다는 심리적 만족. 자신의 수호신이자 분신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다. 일상대소사 또한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듯하지만, 생로병사라는 한계 속 인간에게는 위태위태한 길이다. 자연의 변덕에 따른 위험이 많았던 전통 시대에 길운(吉運)을 바라는 것은 필연이었다. 현대에 ‘위험사회’(울리히 벡)라는 사회학의 용어가 정착된 것처럼,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또 다른 위험이 상존한다. 인류가 촉발시킨 기후 위기를 보면, 자연적 위험조차 사라진 게 아니다. 수로요의 김소연 작업실에서 무려 4.5m 높이의 십장생도를 구경했다. 십장생의 소재를 캐릭터로 만드는 등, 전통의 현대화에 고심하는 작가는 세월을 머금은 느낌의 천에다 십장생도를 재현했고, 종이나 캔버스가 아닌 마천은 어딘가에 걸쳐도 연극적 무대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으로부터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의 도예 버전으로 잔칫상을 만들었다. 파티 테이블처럼 여기저기 배치된 음식처럼 전시를 연출해서,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감상보다는 무대 안으로 관객을 들여보낸다. 그림이라는 형식 또한 만들어진 작은 입체물을 하나하나 담아낸 상자같이 제작하여 열을 맞춰서 벽에 설치했고, 원래 작가의 화풍이 담긴 그림도 소품 위주로 메인 테이블 뒤에 배치했다. 이전 그림의 환상성에 수로요에서 작업한 흙 특유의 따스함이 더해졌다.
작가는 십장생도에 인간이 없는 이유로, 인간은 관람자로 거기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가 선택한 십장생도라는 모델은 예술가 주체보다는 향유자에게 방점이 찍힌 어법을 위한 것이다.
흙의 질감은 구운 빵같은 느낌이 있는데, 작가는 이 전시에서 그러한 속성을 잘 활용해서 진짜 같은 구름빵과 구름파이를 만들었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사람도 성형 욕구를 가진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꾸며진 케잌이나 아이들이 송편을 빚을 때 하는 것 같은 입에 넣고 싶은 작품들이다. ‘먹방’이라는 단어를 세계화시킨 K-문화에서 극락은 맛있는 음식에 있을 수 있다. 잘 차려진 잔칫상에서 우리는 물질적, 육적으로 체화된 유토피아를 본다. 하지만 실제처럼 연출된 그것들을 누군가 입에 넣는다면 이빨이 부러질 것이다. 그려진 빵을 먹을 수는 없다. 김소연의 작품에는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의 속성이 있다. 하지만 작가는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2023년 개인전 부제는 [paradise,here]이었다. 일상과 이상의 조화이다.
행복했던 기억, 또는 그에 대한 기대는 그렇지 않은 일상을 견디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이 현실에 대한 허구의 힘이며, 허구의 현실성이다. 날것의 현실을 완화시켜주는 허구적 요소는 필수다. 이전 시대에는 신화나 종교가 해왔던 역할이다. 현실에서 짧게 성취될 수 밖에 없는 이상은 예술로 자리를 바꿔서 그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작가의 주요 소재인 십장생도는 그 안에 의인화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민초들의 삶과 밀접했던 민속문화와 현대의 대중문화를 연결시키는 매개로 적당하다. 무병장수로 대변되는 십장생도의 주제는 어느 시대고 사람들은 안전과 행복을 바란다는 보편적 욕망에 의해 되살아난다. 작가는 그동안의 작업에서 여행지, 놀이동산 등, 그자체가 행복의 무대가 될 수 있는 장소들을 선호했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하나의 원천도 여러 형식으로 상품화하는데, 김소연의 경우 그림의 소재가 도자예술로까지 확장된 경우다. 하지만 작가는 대중적 염원의 이면도 바라본다. 십장생의 하나인 사슴 캐릭터를 흙으로 빚어 서서히 물에 녹였던 이전 작업처럼, 결국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억의 숲, 상사지장생도(相思只長生圖)
2020
박정수 미술평론가
설화(說話)의 한 장면입니다. 설화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도 오래 산다는 십장생(十長生)의 모양을 그려냅니다. 소나무 옆에는 영지버섯이 있고,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함께합니다. 두 마리의 학은 이미 무르익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김소연이 그리는 모양들은 혼자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말로 하지 못하는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 하기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십장생(十長生)을 오늘에 그린 것은 과거나 현재나 삶에 대한 애착과 애환과 행복추구의 영역이 같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고운 정감이 있습니다. 옛이야기의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은 소담한 이야기가 함께합니다. 바다 깊은 곳의 거북과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사슴은 동질의 것입니다. 김소연이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혼자가 아니라서 좋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상사지(相思只)라는 명제를 붙였습니다. ‘단지사랑’이라 번역해 봅니다. 그녀의 작업노트에 적혀있는 상사지(相思只)에는 ‘기억에 남지 않는 순간들은 모두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순간들은 모두 ‘지금’의 순간이 이었음에도 그 모든 순간을 기억에 기록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래서 더 ‘지금’에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래서 오로지 ‘지금’일 뿐인 소중한 지금 이순간은 찰나의 유일한 순간이며, 오직 지금 한순간에서만 온전할 수 있다. 이 온전한 지금의 순간이 또 지나고 나면 기억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몇몇 컷만이 짧게 남을 뿐이라 나머지 기억되지 못하고 잊어지고 흘려버릴 억만 겁의 순간들이 벌써 아쉽고, 아련하고, 그립다.‘고 했습니다.
매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는 이미 과거와 미래를 함께하는 시간들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의 숲>이라 명제를 담아냅니다. 김소연의 기억에는 누군가와의 삶이 함께합니다. 가족이거나 잊혀 진 누군가이거나 잊혀지기 시작하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한 다발 내밀고도 잔여한 내 마음들을 꽃다발에 잔뜩 심어도 보았고, 그렇게 그린 그림을 들고 있는 솔직한 내 모습도 그려보았고, 그렇게 꺾어다줄 꽃들로 온통 가득한 꽃밭도 그려보았다. 그렇게 너에게 내밀 것들만 고민하고 그림으로 그려보려 했는데, 이제 알게 되었다. 너에게 내밀고 싶은 것은 꽃다발이 아니라, 결국 너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 마음이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경한 마음,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 낯선 공간, 어색한 만남 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불편을 경험하면서, 편리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익숙해지고자 노력합니다. 그녀의 작품에는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곁들임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사랑’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녀의 그림입니다.

김소연. 기억의 순간. 2020. acrylic on canvas. 160x73cm. 국립창원대학교소장